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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해룡

  • 면담자 : 현대사기록연구원(백찬홍)

구술자소개

  • 구술자 : 위해룡
  • 구술일자 / 장소 : 2010년 10월 26일/현대사기록연구원 회의실
  • 구술시간 : 1시간 52분 59초

구술아카이브 > 4.19혁명 > 서울 관련 구술아카이브

구술내용 요약

위해룡은 1940년 평안북도 평원군에서 출생했으며 인천 제물포고등학교와 서울 한양대학교 토목공학과를 졸업했으며 현재는 4‧19 관련 주요단체 중 하나인 4‧19혁명공로자회 사무총장을 맡고 있다. 주요업무는 4‧19관련 유공자에 대한 예우와 사업의 계승발전을 위한 활동을 하고 있다. 구술자는 4‧19의 역사적 의미와 가치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대우가 매우 미진하기 때문에 예우와 관련한 법 개정에 매진하고 있다. 이를 위해 이기택 회장을 비롯해 박관용 전 국회의장, 김현규 전의원, 문정수 전의원, 유인학 전의원. 이청수 전 KBS 본부장, 박훈 전 동대문 구청장 등이 참여하는 특별위원회를 구성해 국회차원의 협력을 모색하고 있다.
위해룡은 검찰간부이면서 토목에 대한 관심이 있었던 친형 위청룡의 권유로 토목공학을 선택했다. 그는 자신이 선택한 토목공학이 적성에 맞았으며 학회 활동을 할 정도로 학구열이 높았다. 구술자가 다닐 당시 한양대에는 학도호국단이 조직되어 있었고 단장을 비롯한 임원들은 간선제로 선출되었다. 학도호국단 외에 과학생회, 학회 등이 활동했다. 특별히 설립자인 김연준이 독실한 개신교신자였던 관계로 SC(기독학생회)가 활발하게 활동했다. 당시 한양대는 당시로서는 서울 외곽에 위치해 있었고 시설이 낙후되어 면학 분위기가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강의실로 가건물이었고 실습도 실제 현장이 아닌 야산에서 진행하는 정도였기 때문에 학생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수업을 진행했다. 
당시 한양대는 공과대학만 있었을 뿐 인문사회계열이 없었기 학생들은 정치‧사회적으로 소극적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자유당 정권의 독재에 대해서도 있을 수 있는 통치과정에서 있을 수 있는 일로 받아들였다.
1960년에 접어들어 2월 28일 대구에서 경북고, 경북여고, 대구고 등이 대규모 시위를 벌이고 마산을 중심으로 3‧15 부정선거 규탄시위가 일어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양대 학생들은 사건으로만 접했지 직접 시위에 참여한다는 의식이 없었다. 학생들이 동요하기 시작한 것은 4월 11일 마산에서 김주열의 주검이 발견되면서 부터였다. 김주열의 주검이 발견된 후 사회 여론이 폭발 직전에 이르자 치안당국은 사복경찰을 통한 통제를 강화했다. 한양대에도 다수의 사찰이 진행되어 학생들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했고 학교 측도 학생들의 동요를 막는데 주력했다.
당시 학도호국단은 친정부적이었으나 자유당 정부의 독재와 부정선거, 김주열의 죽음 등에 자극을 받아 반정부적 입장을 가지기 시작했다. 한양대 학도호국단 간부들은 타 대학 호국단 또는 학생회와 접촉하여 당시 정세를 공유하고 시위방안을 모색했다.
4‧19를 전후해 시위를 추진 중이던 한양대 학도호국단은 4월 18일 고려대 학생들이 정치깡패들에게 테러를 당하자 4‧19 당일 시위를 전개하기로 한다. 당시 시위는 호국단장 남효명, 부단장 문효용 외에 각 과학생회 대표들이 주도했다. 화공과 김병희, 토목과 김병수 등이 나섰고 시위는 오후부터 진행되었다. 한양대 시위참여자는 500~600여 명으로 추산하며 이들의 이동 경로는 행당동에서 왕십리, 신당동을 거쳐 시청, 종로였다. 이들은 학교 인근에 있던 성동경찰서가 바리케이드로 막고 행진 도중 경찰의 저지가 계속되자 본진을 2개로 나누어 시내로 들어오기로 하고 구술자를 포함한 1진은 동대문운동장에서 종로를 거쳐 광화문으로, 2진은 을지로에서 시청 방향으로 행진했다. 이러한 행진 과정에서 1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광산과 안경식이 종로6가를 막고 있던 경찰의 총탄에 의해 희생됐다. 
이날 시청과 국회, 광화문에 집결한 한양대 시위대는 전체 시위대와 함께 광화문을 거쳐 경무대 방향으로 행진을 했다. 경찰은 시위대가 경무대로 진출하자 사격을 했고 이때 기계과 정인석도 총탄에 맞아 병원에 입원한 후 며칠 후 사망했다. 학도호국단 외 토목공학과 안경원, 김재중, 장정훈, 김복수, 박종대, 섬유과 최만조, 화공과 박철규, 건축과 김덕일, 원자력과 김해삼, 김재중 등이 앞장섰다. 시위대의 구호는 부정선거 규탄 외에 사회적으로 회자되던 '못 살겠다 갈아보자',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등이었다. 
이날 시위는 오후 4시 30분 부산, 대구, 광주, 대전에 경비계엄 선포, 오후 5시 서울 등 5개 도시 경비계엄을 비상계엄으로 전환, 통금시간 연장(오후7시~익일 5시) 포고문 발표 등으로 인해 일부는 해산했고 구술자 역시 귀가했다.
4‧19 당일 한양대는 1명이 즉사하고 1명이 사경을 헤매고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하자 4‧19 이후 시위는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구술자는 처음에는 시위가 학생들 중심으로 순수하게 진행되다가 일반 부랑자들까지 가세하면서 무질서하게 진행되었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더 이상 시위참여는 의미 없다고 판단해서 당시 성동경찰서를 방문해 이른바 평화협정을 맺고 더 이상 시위에는 참여하지 않기로 했다. 한양대 학생들은 시위 대신 거리 정화나 질서회복에 나서기로 했다. 
예외적으로 활동했던 것은 이기붕 부통령 당선자와 한이석 국회부의장이 미군 기지를 통해 해외로 망명한다는 소문을 듣고 이기붕 체포대를 조직해 인천 미군부대를 방문하기도 했다. 이때 300여 명의 학생들은 트럭으로 인천 미군부대로 이동해 직접 사령관과 면담하기도 했다.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고, 한양대 학생들은 수습대책반을 조직해 경찰 대신 교통정리를 비롯한 치안활동을 전개했다. 생활고로 인한 각종 공공시설물 절도행위 등을 단속하기도 했다. 이승만 하야 이후 치러진 총선에서 민주당이 승리를 거두고 장면 내각이 들어서는 과정에서 '대한민국대학생총연합회'라는 이름의 전국적인 학생운동조직이 결성됐다. 이 당시 의장은 경희대 출신 정동성이었고 상임위원장은 중앙대 출신 유용태, 구술자 위해룡은 재무분과위원장을 맡았다. 이들은 남북통일을 주장하는 민족통일학생연맹 등과 대립하면서 때로는 물리적 충돌을 빚기도 했다. 
위해룡은 박정희 정권 초기 검찰국장을 지낸 친형 위청룡이 북한에 거주하고 있던 부친 위태석의 편지를 가지고 온 사람이 체포되면서 간첩혐의로 조사받다 의문사당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위해룡이 4학년이 되던 해 한양대(당시 공대)가 종합대학으로 승격되면서 초대 총학생회장으로 당선되었다. 당시 타 대학의 총학생회장들이었던 서울대 이태섭, 경희대 정동성, 중앙대 유용태 등은 정치권으로 진출했지만 구술자는 정치권에 들어가지 않았다. 당시 4‧19 주역들은 5‧16군사쿠데타 이후 정치권으로 포섭 또는 참여하면서 분열되었다. 진술자는 이들이 공화당과 민주당으로 흩어진 후 각자 당의 입장에 충실했고 4‧19 정신을 올바로 계승하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위해룡은 4‧19 공로자에 대해 독립유공자 수준의 예우를 받기 위해 입법활동을 벌이고 있다. 사회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4‧19에 대한 의미축소와 이승만에 대한 재평가가 진행되는 것에 대해서는 있을 수 없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이승만 동상세우기는 이화장 등 사적인 공간에서는 가능하지만 광화문 같은 공공장소에 세우는 것은 불가하다는 입장이다. 4‧19에 대한 계승발전사업으로는 중‧고등학교 및 대학에 이르기까지 4‧19에 대한 이해를 위해 강사진을 조직해 순회교육을 계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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