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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주

  • 면담자 : 현대사기록연구원(박재홍)

구술자소개

  • 구술자 : 권오주
  • 구술일자 / 장소 : 2010년 7월 2일/구술자의 사무실
  • 구술시간 : 1시간 55분 13초

구술아카이브 > 4.19혁명 > 서울 관련 구술아카이브

구술내용 요약

권오주는 1941년 서울 성북구 출생으로 1960년 강문고등학교(현 용문고등학교) 야간부 3학년 재학 중에 4월혁명을 맞이하였다. 
4‧19 이전 강문고 학생들의 정치참여 인식은 언론(신문)과 주변인들을 통한 간접적인 정보교류와 수집이 주였다고 할 수 있다.  구술자 권오주는 당시 선거로 선출된 강문고 야간부 학생위원장을 맡아 '협심회'라는 모임체를 조직하여 고교생 시위를 주도하였다.  협심회에는 강문고 외 동북고, 양정고, 중동고, 오산고, 금명, 숭의, 동구여상 등이 참여했으며 설송웅, 김수길 등이 멤버였다.  리더는 홍충식, 설송웅, 권오주 세 사람이었다.
2‧28 이전 단발적인 시위와 서울시내 고등학교(동북고 등) 개별 학생들과 연계하여 1960년 3월 12일-14일 화신백화점 앞 횃불 시위를 소규모로 주도하였다. 
이후 3월 5일 명동 시공간 삐라 살포를 주도하여 경찰에 연행되어 훈방되었으며 4월 11일 김주열 학생 사건과 4월 18일  고려대생 피습사건은 4월19일 시위참여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당시 강문고는 99칸이었는데 4월18일 날 학교 내 선생님들의  저지를 뚫고 교문을 나서 고려대생 피습사건 현장을 목격하였다. 당시 강문고는 창신동에 위치해 있어 고대생들이 시내로 진출하려면  대광고와 강문고를 거칠 수밖에 없었다. 을지로 천일백화점 앞에 이르렀을 때 고대생들이 갈고리에 찍혀 바닥에 피 흘리며 누워있는  것을 보았다. 고대생들을 인근 천일약국으로 옮기고 분이 안 풀려 동대문파출소에 불을 질렀다. 학교를 나설 때 전교생 2천 명 중 천  명 정도가 합류했는데 나중에는 3백 명 정도 남았다.
4월 19일 강문고 시위는 4월 18일 고려대생들의 피습사건에 자극받아 자연발생적으로 발생하였다. 전날 자정이 다 되어 학교로  돌아왔지만 다음날 시위에 대해서는 별다른 계획이 없었으나 19일 아침 저절로 시위 참여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4월19일 학교 밴드를 앞세워 교문을 나서 동대문을 거쳐 종로5가, 종로4가, 국민대학 앞으로 시위를 전개하였다. 종로4가 시위  도중 총격을 받아 그룹별로 이루어지던 시위대가 해산된 후 흩어져 시위대를 형성하였다. 종로4가에서는 광화문 방향이 막혀 원남동  쪽으로 가다가 보성고 , 동성고 와 합류하였다. 
경무대 문 앞에서 이승만 대통령과의 면담을 요구하여 시민학생대표 중 한 명으로 협심회의 설송웅이 갔는데 대표를 따로 뽑지는 않고 맨 앞줄에 있던 사람이 들어간 것이다. 
4월 20일 이후 계엄령 선포와 해제, 대학교수단 시국선언문에 이은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발표의 수습과정은 정치인들에게 맡기고  대다수 학생들은 본연의 임무로 돌아왔다. 당시 구술자는 1960년 5월 18일 4‧19 위령제에 참여 하여 4월혁명 수습대책에  참여하였다.    
4월 24일 이기붕의 사퇴 발표 다음 날인 25일에 있은 대학교수 시국선언에 대해서는 기회주의적이라는 생각을 가졌다고 증언했다. 또  4‧19 주체세력에 대해서는 고등학생이 주체다, 대학생이 주체다 하는 것은 다 부질없고 국민 전체가 봉기해 자유를 쟁취한  것이라는 평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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