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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제 폐지를 향한 여정

  • 등록일자 : 18/12/17

국회 로비의 두 눈물

1989년이 저물어 가는 12월 19일. 국회 본회의장 입구 로텐더 홀. 두 무리의 사람들이 흘리는 뜨거운 눈물이 로비를 채웠다. 갓과 도포를 챙겨 입은 백발의 노인들이 ‘나라가 망했다’며 울었다. 부계혈통 중심의 가부장적 가족제도가 이 사회 최후의 보루라고 믿었던 그들은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통곡했다. 그 맞은편에서는 이제야 모든 인간을 위한 세상이 열리기 시작했다며 한 무리의 여성들이 만세를 부르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남녀는 다 같은 인간’이라는 당연하고 간단한 사실을 법조문에 넣기까지 자그마치 37년이나 걸렸다는 것이 서럽고 기뻐서 울었다. 「가족법 개정을 위한 여성연합회」 이태영 회장은 여섯 줄 남짓한 짧은 성명서를 읽으면서 목이 메어 몇 번이나 말을 멈췄다. 

5천년 인간차별의 전통을 무너뜨렸습니다. 현행 민법 제정 이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37년 동안 전 여성의 끈질긴 투쟁으로 오늘 그 길고 높고 두꺼운 인간차별의 장벽이 무너졌습니다. 그동안 가족법개정운동에 동참해 온 사회 각계각층의 여러분께 감사드리며 13대 국회와 정부의 노력에 대해서도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아직 동성동본불혼제와 호주제의 잔재가 남아있어 매우 유감스럽습니다. 앞으로 빠른 시일 안에 이를 말끔히 정리할 것을 기대하며 우리는 계속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 

물론 이 날은 성명서에서 밝혔듯이, 호주제 폐지로 완성되는 가족법(정확하게는 민법의 친족 상속 편이 맞는 용어이나, 가족법이라는 말이 지닌 운동사적 의미, 특히 이 속에 담긴 여성들의 땀과 눈물을 기린다는 의미에서 이 말을 그대로 쓴다) 개정, 그 머나먼 길의 겨우 삼분의 이 지점을 통과하는 날이었다. 호주제 폐지까지는 이때로부터도 무려 15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그러나 호주의 권리 의무가 대폭 축소되고, 이혼여성의 재산분할 청구권이 신설되었으며, 친족의 범위가 조정되는 등 이 날 통과한 가족법 개정안은 호주제 폐지로 가는 여정에서 가장 중요한 길목을 통과하는 것이기도 했다.   

제정부터 개정운동이 시작된 가족법   

가족법 개정운동. 사실은 ‘위헌적인 민법’ 폐지 운동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1948년 7월 17일 공포된 제헌헌법은 남녀평등에 관해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을 선포하면서 제 8조에서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며 성별, 신앙,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제 20조에서 “혼인은 남녀동권을 기본으로 하며 혼인의 순결과 가족의 건강은 국가의 특별한 보호를 받는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하위법인 민법(일제 강점기에 쓰던 민법과 구별하여 신민법이라고 불렀다)은 헌법의 정신을 정면으로 위배하고 전통적 관습에 입각하여 제정되었다.   

여기서 전통적 관습에 입각한 법이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5천년 전통’의 관습이라는 의미일까? 그렇지 않다. 1910년 일제는 우리 민족을 강점하면서 근대적 의미의 민법인 <조선민사령>을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의 가족상속제와 8촌 이내는 결혼하지 않는 우리의 결혼 관습 등이 혼용되어 ‘호주’라는 법률적 권리가 생겨났다. 식민지 시대가 끝나고 우리 민족이 새 출발을 하는 마당에 일제강점기의 민법을 ‘전통’으로 존중하는 법이 만들어진 것이다. 

법률 제정 위원장을 맡았던 김병로 당시 대법원장은 “남녀동등이라는 헌법정신에 위반되더라도 건실하고 순풍미속이라고 인정할만한 점은 장려하고 완성시킬 의도 하에 친족상속편을 기안했다.”고 말했다. 그는 남녀평등이란 사회 영역에서 동등한 기회를 갖는 것을 의미할 뿐, 가정과 친족의 문제에서는 부계 혈통 중심의 전통적 관습을 존중하는 것이 옳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이때 대부분의 여성들은 자신의 운명을 가를 중대한 법이 어떤 식으로 제정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여성 최초의 고등고시 합격자로 당시 사법관 시보로 실무 실습을 하고 있던 이태영도 사석에서 차별적인 신민법안의 내용을 들었을 정도였다. 

사실 신민법 초안이 마련되어 국회를 통과하고 시행되기까지 6년여의 세월동안, 많은 여성들이 차별적인 신민법 제정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신민법이 국회를 통과하는 그 순간에도 여성들은 국회의사당 앞에서 “여권을 보장하라”고 외치고 있었다. 가족법은 제정되던 그 순간부터 수많은 여성들의 절규와 눈물 속에 태어났던 것이다.

깃발을 내릴 수 없었다

가족법은 여러 번의 개정을 거쳤다. 시기마다 차이가 있지만, 가족법이 국민 생활에 미치는 영향은 이러했다. 예를 들어, 한 부부가 있다 치자. 가난했던 이들은 수 십 년간 갖은 고생을 한 끝에 큰 재산을 일궜다. 딸만 둘이었는데, 이 애들이 자랄 때는 제대로 먹이지도 입히지도 가르치지도 못했다. 딸들은 원망하지 않고, 가게 바닥에서 부모와 같이 먹고 자면서, 학교 갔다 오면 손님들 심부름도 하면서 함께 수 십 년을 고생했다. 호사다마라던가. 이제는 고생 않고 살 수 있겠다 싶을 때 그만 남편이 병이 들어 세상을 떠났다. 빈소에서 슬피 울며 통곡하던 세 모녀 앞에 이제 10살도 채 안된, 생전 처음 보는 남자 아이가 나타났다. 남편의 아들이었다. 아내의 동의 없이 몰래 혼외자를 입적할 수 있던 때였다. 그 아이는 이제 호적 상 세 모녀의 호주가 되었다. 평생 함께 한 노년의 아내에게도 없는 권한이 소년에게는 있었다. 함께 고생한, 시집간 딸에게는 재산을 나누어 줄 수 없지만 이 소년에게는 모든 것이 상속된다.  이것이 호주 중심 가족법이었다. 국회 로비에서 여성들이 뜨거운 눈물을 흘린 데에는 이런 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89년 12월의 대폭적인 개정에도 불구하고, 가부장제의 상징인 호주제를 폐지하지는 못했다. 호주제는 출생, 사망, 결혼 등 개인의 신분 변동을 호주를 중심으로 기록하도록 하는 제도이다. 호주는 남자에게 우선순위를 주었다. 그러니까 법적으로 보면, 여자는 아버지의 호적에 자녀로 존재하다가 결혼하면 남편 혹은 시아버지의 호적에 처 혹은 며느리로 존재하게 된다. 어제까지 가족이었던 부모형제와는 남남이 된 채, 새로운 가족에 편입되는 것이다. 당연히 본적도 바뀐다. ‘딸은 남의 집 사람이 될 사람’이라는 말이 호주제 아래서는 정확한 말이었다. 여기에서 오는 법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불이익은 이루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여아 낙태는 하나의 극단적인 결과였다. 

그렇기에 호주제가 남아 있는 한, 가족법 개정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1997년 3월 8일 여성의 날을 맞이하여 저명인사 170명이 '부모 성 함께 쓰기운동'을 시작하면서 가족법 개정운동은 다시 국민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부모 성 함께 쓰기’는 부계혈통주의 고정관념을 깨뜨리기 위해 시작된 일종의 문화운동이었다. 

1999년 4월, 한국여성단체연합(여연)을 비롯한 시민운동단체들이 호주제의 문제점과 대안을 주제로 토론회를 열었다. 이 토론회를 계기로 인터넷과 PC통신, 언론매체에서 찬반토론이 다시 거세어졌다. 1999년 하반기에 ‘호주제폐지운동본부’를 설립하였고, PC 게시판 공간을 중심으로는 특정한 단체에 소속되지 않은 시민들이 ‘호주제 폐지를 위한 시민 모임’도 만들었다. 다양한 주체, 다양한 통로, 다양한 방식의 운동이 전개되었다. 인터넷에서 지지 여론을 확보하기 위한 논쟁이 벌어지고, 각종 토론회와 거리 퍼레이드, 문화캠페인, 일인 시위 등이 이어졌다. 여연은 국정감사 모니터링을 활발하게 전개하여 대선, 총선 시기에 각 후보들이 호주제 폐지 공약을 채택하도록 노력했다. 

호주제 위헌소송은 이러한 상황 아래 진행되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이 주도한 이 소송은 5년에 걸친 긴 싸움 끝에 헌법불합치 결정을 받아냈다. 그에 따라 2005년 3월 2일 국회 본회의의 의결로, 성차별의 상징이었던 호주제가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다. 여성운동권이 반세기 넘게 펼쳐온 가족법 개정 운동이 끝을 맺는 순간이었다. 15년 만에 다시 한 번 뜨거운 눈물이 국회 로비에 흘렀다. 

글 정영훈 (사)한국여성연구소 소장. 자유기고가. 인터뷰 작가.
여러 매체를 통해 인간과 세상에 대한 탐구를 계속하고 있다. 「새길에서 만난 사람」「여성, 나를 말하다」「얼지마, 죽지마, 페미니즘」「한국여성운동구술기록」「우리 젊은 날- 구로공단이야기」「현장의 젠더」등 다양한 글과 영상물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