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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이소선

  • 등록일자 : 17/06/20

이소선은 젊은이들이 목숨을 바쳐 항거하거나 감옥에 끌려갈 때마다 마치 자신이 죄를 지어 생긴 일처럼 마음이 아팠다. 숱한 학생과 노동자들이 전태일 평전을 읽고 죽음으로 항거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괴로움에 시달렸다.

1986년 3월 17일 신흥정밀에 다니던 노동자 박영진이 분신했다. 그는 임종을 앞두고 마치 꿈과도 같이 이소선을 만날 수 있었다.

중환자실 앞에서 형사들이 가로막고 있었다.

“영진이 어딨냐?”

“지금 못들어 갑니다.”

“박영진 어머니 됩니까?”

“그래, 내 아들이다. 썩 비키지 못해”


“나, 태일이 엄마다.”  

박영진은 떠지지 않는 눈을 꿈틀거렸다.

“저, 정말이야? 전태일 엄마 맞아?”

“ 그래, 태일이 엄마다. 왜 이랬어! 살아서 싸워야지. 살아서 싸워야지. 돌아올 수 없는 길을 왜 가니!”

“걔네들이 배곯아가며 두들겨 맞아 가며 청계를 만들고 지켜오지 않았으면 내가 태일이 하고 한 약속을 어떻게 지킬 수가 있었겠어. 난 그냥 미쳐서 죽었을 거야.”

민주 노조파괴 공작을 자행했던 전두환 정권은 1981년 1월 6일 청계피복노조에 해산 명령을 내리고 노조 사무실을 폐쇄했다. 청계피복노조는 해산 명령을 거부하고 치열하게 싸웠다. 그 과정에서 이소선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구속되기도 했다. 청계피복노조는 1987년까지도 합법성을 인정받지 못했다. 전두환이 물러나고 노태우 정권이 들어선 이후에야 합법성이 인정되었다.

전태일과 같은 죽음을 막기 위해서라도 하루 빨리 유가족협의회를 만들어야 했다. 1986년 8월 12일 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유가협)가 출범했다. 이소선은 초대 회장에 뽑혔다.

“저는 지식이 없어 회장 같은 것은 못합니다. 그냥 여러분과 함께 싸우는데 쫓아다니는 그런 일밖에 못해요.” 한사코 거절했지만 회원들의 간청을 저버릴 수 없었다. 

유가협은 사무실도 없이 이러저리 떠돌다 1년 뒤 마리스따 수도원에 사무실을 마련했다.

평화적 시위적 보장하겠다던 경찰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한 노동자가가 경찰이 쏜 최루탄을 가슴에 맞고 쓰러졌다. 부검을 통해 오른쪽 가슴과 폐에서 최루탄 파편 4개가 발견되었다. 그는 22살의 대우조선 청년 노동자 이석규였다.

이석규가 숨을 거둔 지 엿새째 되는 날, 부슬부슬 비가 내렸다. 장례위원장을 맡은 이소선의 다리가 후들거렸다. 한 노동자를 또 전태일의 곁으로 보내야 하는 슬픔에 억장이 무너졌다.

“어머니도 근로기준법을 배우세요.” 태일이 말했다.

“뭐? 법? 내가 법을 배워서 뭐하냐? 밥이 되는 것도 아닌데.”

“어머니, 뭐든지 배우면 다 쓸 데가 있어요.”

이소선은 태일의 청에 못 이겨 노동법 공부를 시작했다. 태일이가 하나씩 가르쳐 주면 이소선은 따라 읽었다.

이소선은 전태일의 분신 후 41년을 한결같이 노동자의 곁을 지켰다.

* 일부의 내용은 이소선의 구술을 바탕으로 쓴 <<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오도엽 씀)에서 인용하여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