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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3ㆍ1민주구국선언사건(명동사건)

1975년 유신정권의 긴급조치 9호 발동 이후 한국사회 전체가 유신체제의 강압 통치로 인해 질식하고 있었다. 강요된 침묵의 한해를 보내고 1976년도를 맞이하게 되자 사회의 양심 세력들 내에서는 경직된 상황을 타개하고 국민들에게 민주화의 정당성을 알리기 위한 어떤 노력이 재개되어야 한다는 분위기가 움텄다. 이런 분...

1975년 유신정권의 긴급조치 9호 발동 이후 한국사회 전체가 유신체제의 강압 통치로 인해 질식하고 있었다. 강요된 침묵의 한해를 보내고 1976년도를 맞이하게 되자 사회의 양심 세력들 내에서는 경직된 상황을 타개하고 국민들에게 민주화의 정당성을 알리기 위한 어떤 노력이 재개되어야 한다는 분위기가 움텄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3·1절이 다가오자 소위 ‘재야민주화진영’ 여러 갈래에서 3·1절에 즈음한 성명 또는 시국선언이 모색되었다. 문익환 목사는 1976년 2월 12일 3·1절을 기해 발표할 선언문 초안을 작성하였다. 문익환 목사는 함석헌, 김대중, 문동환, 이문영, 정일형, 윤보선 등과 협의를 통해 초안을 수정하여 “민주구국선언”을 완성하게 된다.

1976년 3월 1일 오후6시, 명동성당에서는 전국에서 올라온 20여명의 사제단 신부들이 공동 집전하고, 2천여 명의 신·구 교회 관계인사 및 신자가 참석한 가운데 3·1절 기념미사가 열렸다. 1부와 2부로 나뉘어 진행된 이 미사는 1부에서 사제단의 김승훈 신부가 강론을, 2부에서는 개신교의 문동환 목사가 설교를 맡았다. 이어 2월 16일 전주에서 있었던 기도회의 경과보고 형식으로 전주에서 올라온 문정현 신부가 김지하 어머니의 호소문을 낭독했으며, 마무리기도의 형식을 빌어 서울여대 이우정 교수가 재야인사 10명이 서명한 “민주구국선언”을 낭독했다. “민주구국선언”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내세우면서 일인 독재 아래 인권은 유린되고 자유는 박탈당하는 현실을 비판했고, 정치·경제·통일 등의 분야에서 한국사회가 나갈 방향을 피력했다. 그리고 9시 45분경 3·1절 기념미사는 아무 일 없이 조용히 끝났다.

이 평범한 미사가 갑자기 세인들의 관심거리로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1976년 3월 10일이었다. 이날 오후 5시 30분 서울지검 서정각 검사장은 ‘일부 재야인사들의 정부전복 선동사건’이 발생하여 관련자 20명을 대통령 긴급조치 9호 위반혐으로 입건했다고 발표했다. 이날의 기자회견에서 서검사장은 미리 준비된 발표문만을 낭독한 뒤 기자들의 질문을 받지 않고 기자회견을 끝냈다.

3월 26일 입건자들을 기소하면서 검찰은 “3·1절 명동성당 민주구국선언사건”이라는 긴 이름아래, 그때까지 있었던 여러 집회와 기도회를 짜깁기하여 사건을 눈덩이처럼 부풀렸다. 즉 “3·1절 명동성당 민주구국선언사건”을 빙자하여 당시 유신권력에 눈엣가시처럼 여긴 많은 사람들을 각기 다른 혐의를 들씌워 투망식으로 이 사건에 옭아맸다. 이 사건을 기화로 재야민주진영에 정치보복을 감행한 셈이었다. 유신체제는 이 사건을 이유로 문익환 등 11명을 구속하고 이태영 등 9명을 불구속입건했으며, 이후 일체의 3·1절 행사를 경찰력을 동원하여 원천봉쇄했다.

유신정권의 계획적인 탄압에도 불구하고 “3·1절 명동성당 민주구국선언사건”은 유신체제에 반대, 항의하는 범재야민주세력의 실체를 내외에 드러내는 결과가 되었다. 이 사건이 유신체제의 한가운데 가장 어두운 시기에 이루어진데다, 참여한 면면이 전직 대통령, 제1야당의 대통령후보, 현역정치인, 재야원로와 교수, 신·구 교회의 중심인물들 이었다는 점에서 내외에 미치는 파장이 클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법정에서 정치적·법률적인 체제공방도 치열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사건을 계기로 재야민주세력의 새로운 연합이 형성되었다는 사실이다.

한편 1심 재판이 한창인 8월 광주지역에서 제2명동사건이라 불리는 ‘3·1민주구국선언을 지지한 광주지역 성직자 구속’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이 사건의 경과는 다음과 같다.

“3·1민주구국선언”사건으로 기독교장로회소속 인사들이 다수 구속되자 기장은 이 사건에 특별한 관심을 표명하였다. 그 결과 기장 전남노회는 당국의 고의적인 사실왜곡보도에 대항하여 교회의 입장을 밝힐 필요를 절감하였다. 1976년 3월 18일 목표 연동교회에서 임시노회를 개최하여 ‘명동사건’에 대한 입장을 표명하는 내용의 결의문을 작성·발표하기로 하였다. 3월 26일 작성된 문안을 노회 산하 140여 개의 교회에 발송하고자 하였으나 경찰에 의해 무산되었다. 4월 22일 광주 한빛교회에서 개최된 정기노회에서 “유신헌법 철폐하고 민주헌정 회복하라”는 항목을 첨가한 4개 항의 결의사항을 담은 결의문을 낭독하고 130여 명의 노회원들이 만장일치로 이를 채택하였다. 이후로도 이 결의문을 기도회 등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낭독하기로 하고, 실제로 5월 18일 양림교회에서 열린 임시노회에서 배성룡 목사가, 7월 8일 함평군 함평읍 교회에서 모인 기도회에서 윤기석 목사가 이 결의문을 낭독하였다. 그 후 8월 10일 양림교회에서 기장 전남노회 임시노회가 개최되었다. 이에 앞서 선교활동자유수호위원회 주최로 고난 받는 자들을 위한 기도회를 개최하여 장광섭 목사가 선교 자유와 인권 문제를 내용으로 설교하고, 강신석 목사가 결의문을 낭독하였다. 유신정권은 이날 기도회를 문제 삼아 ‘3·1민주구국선언’을 지지하며 유신헌법 철폐와 언론, 종교의 자유를 요구한 혐의로 9명을 연행하고 이 중 4명을 구속하였다. 1977년 4월 2일 항소심 선고 공판에서 임기준·조홍래 목사는 징역 4년 자격정지 4년을, 윤기석·강신석 목사는 징영 3년 자격정지 3년을 각각 선고받았다.

주요출처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한국민주화운동사 연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민주화운동관련 사건· 단체 사전 편찬을 위한 기초조사연구(1970년대)보고서Ⅰ』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유신과 반유신』 김정남,『진실, 광장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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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소개

이 사건과 관련하여 소장하고 있는 사료는 59건이다. 주요사료로는 재판의 자유로운 진행 및 가족들에 대한 탄압을 비판하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성명서>(등록번호 : 059754), <명동사건 항소심 공판내용>(등록번호 : 484036),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인권위원회의 대법원 확정판결에 대한 입장 성명서>(등록번호 : 419778), <출옥인사들의 출옥성명서>(등록번호 : 105732), <3·1민주구국선언사건 피고들의 김대중씨 석방요구 성명서>(등록번호 : 444414) 등이 있다. 일명 제2명동사건과 관련하여 <3·1절 기도회사건에 대한 결의문>(등록번호 : 527450)이 있다. 특히 3.1민주구국선언사건 가족들은 정권의 온갖 탄압에도 불구하고 재판과정에서 다양한 형태의 활동을 전개하였는데, 박용길 장로께서 당시 활동에 사용한 보라색 옷(등록번호 : 033709), 시위에 둘렀던 메달(등록번호 : 033707), 어깨숄(등록번호 : 057144), 반지 등 여러 점의 박물류 사료를 기탁하여, 역사전시회 등을 통해 전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