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1970년대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사건

1973년 12월경, 대학생들은 1973년 10월 이후의 반유신 학생 시위를 평가하면서 재야세력도 힘이 약화된 상황에서 유신과 긴급조치라는 폭압적인 통치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전국적인 규모로 조직된 학생들의 투쟁이 있어야 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이를 준비해 왔다. 1974년 1월 중순 각 지역 대학 대표들이 회합을 거...

1973년 12월경, 대학생들은 1973년 10월 이후의 반유신 학생 시위를 평가하면서 재야세력도 힘이 약화된 상황에서 유신과 긴급조치라는 폭압적인 통치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전국적인 규모로 조직된 학생들의 투쟁이 있어야 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이를 준비해 왔다. 1974년 1월 중순 각 지역 대학 대표들이 회합을 거쳐 3월 하순 경 일시적인 전국 시위 계획과 유인물의 공동 사용을 결정하였고, 유인물의 공신력과 대중적 설득력을 갖기 위해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로 했다. 4월 3일을 기해 학생들의 전국적인 시위가 준비되었다. 그러나 사전에 학생들의 움직임을 파악한 박정권은 3월 29일에 대학생들을 대대적으로 검거하기 시작하였다. 학생들이 계속 검거되는 상황에서 4월 3일 서울대 등 몇몇 대학에서 소규모 시위가 있었으나 곧 압도적인 경찰 병력에 의해 진압되었다.

1974년 4월 3일 밤 10시, 박정권은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이 북한의 사주에 의하여 정부 전복을 기도하였다며 긴급조치 4호를 발동하였다.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관련 활동을 금지하고 관련자는 최고 사형에 처하며, 긴급조치 위반자가 소속된 학교의 폐교와 유사시 군병력을 출동하며, 위반자는 영장 없이 구속하여 비상군법회의에서 심판, 처단한다는 것이었다. 4월 25일 신직수 중앙정보부장은 중간발표를 통해 민청학련의 배후에 “과거 공산계 불법단체인 인혁당 조직과 재일 조총련계와 일본 공산당, 국내 좌파 혁신계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발표하여 인혁당이 민청학련을 조종한 것으로 발표했다.

나아가 민청학련에 가입한 자는 물론, 물질적으로 찬조한 자, 정신적으로 찬양 고무한 자, 심지어는 구성원과 만난 자까지도 최고 사형으로 다스릴 것이며, 또 민청과 관계없이 학생이 학교 내외에서 집회 시위 성토 농성 등을 해도 최고 사형으로 다스릴 것이라 밝히고, 이 조치 위반 혐의자에 대해서는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 수색하여 군법회의에 넘기는 등 전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억압과 탄압을 가하였다. 민청학련 관련 수배자 두 사람에게는 당시 간첩 현상금 30만원보다 훨씬 많은 200만원의 현상금이 걸렸다. 박정권은 민청학련 사건으로 1,024명을 조사해 203명을 구속했다. 그 중에는 윤보선 전대통령과 박형규 목사, 김찬국 교수, 김동길 교수, 지학순 주교가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군사재판 중 변론을 맡았던 강신옥 변호사가 법정모독과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되기도 하였다. 6월 14일 비공개, 또는 피고인 가족 1인만 참석이 허용되는 가운데 시작된 비상보통군법회의 1심 재판은 사형 9명, 무기징역 21명 기타 140명에 달하는 피고인들에게 도합 1,650년에 달하는 징역 형량을 선고하였다.

1974년 한여름 내내 긴급조치 피의자들을 다룬 군법회의 공판정은 연일 사형, 무기징역, 20년, 15년 등 유래 없는 중형을 선고하여 내외에 큰 충격을 던졌다. 박정권의 무모한 시도는 오히려 더 큰 저항을 불러왔다.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는 집회, 시위가 학계 및 종교계를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번져갔다. 각계각층의 반독재 민주화투쟁이 격화되었고 국제여론 또한 악화되었다. 1975년 2월 국내외의 압력에 견디다 못한 박정권은 인혁당 관련자와 반공법 위반자 일부를 제외한 사건 관련자 전원을 석방했다. 민청학련 운동은 그 자체로는 비록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민청학련 이름으로 발표된 선언문들은 민주화 운동의 사상적 수준의 발전을 보여 주었고, 학생운동의 전국적 통일, 일반 재야운동과의 연대라는 점에서도 크게 평가할 만한 것이었다. 대학생들의 전국적인 시위계획을 빌미로 유신반대세력을 일거에 제거하려던 박정권의 무모한 시도는 오히려 더 큰 저항을 불러일으켰고, 유신반대세력을 강화시켰다. 민청학련 관련자들은 이후 7~80년대 반유신투쟁, 반독재민주화운동의 중심세력으로 활동했다.

2005년 12월 ‘국가정보원과거사진실규명을통한발전위원회(이하 진실위)’는 이 사건에 대한 재조사를 실시하였고, 인혁당 및 민청학련 사건 고문조작 사실을 인정했다. 진실위는 ‘이 사건은 학생들의 반정부시위를 대통령이 직접 나서 공산주의자들의 배후조종을 받는 인민혁명 시도로 왜곡한 학생운동 탄압사건’이라고 발표했다. 2007년 1월 23일 재심청구를 한 인혁당 사건도 무죄선고를 받은데 이어 민청학련사건 관련자들도 2008년 5월 ‘민청학련사건 재심추진위원회’를 결성하여 명예회복을 추진하였으며, 2009년 9월 사법부는 민청학련사건 관련자들에게 "내란죄로 인정할 증거가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이로써 30여년 이상을 박정희 정권에 의해 왜곡되었던 민주화운동이 제대로 된 가치를 인정받는 계기가 됐다.

주요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한국민주화운동사 연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 서중석 저,『한국현대사 60년』 서중석, “3선개헌반대, 민청학련투쟁, 반유신투쟁”, 『역사비평』 (1988, 여름) 장을병,“민주화운동의 이념과 전개”, 『한국사회연구』3(1985.3)

내용보기

사료소개

이 사건과 관련하여 성명서, 재판자료, 탄원서, 호소문, 신문스크랩, 사진 등 약 190여 건의 사료가 소장되어 있다. 이 사건과 관련한 중요사료는 1974년 4월 3일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명의의 <민중 민족 민주선언>(등록번호 : 480510)으로, 당시 학생운동의 사상적 수준을 보여준다. <민중 민족 민주선언>은 “소위 유신이란 해괴한 쿠데타 국가 비상사태와 1.8 조치 등으로 이어진 폭압체제”라고 유신체제를 정면으로 비판하며, “남북대화는 영구집권을 위한 장식물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7.4공동선언의 허구성을 폭로하면서, 민생, 민권, 민중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사료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민중 민족 민주선언>은 원본이 아니라 독일에서 발간된 신문에 결의문이 생략된 채 부분 개제된 것이다. 1973년 4월 3일 이화여자대학교 명의의 <선언문>(등록번호 : 480506)은 “오늘 오후 2시, 우리 이화인은 서울시내 전 대학생이 모이는 시청앞 광장과 청계천 5가 네거리에 집결한다”라고 행동사항을 밝혀 민청학련의 통일된 행동지침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1974년 3월 21일 경북대학교의 <反獨裁民主救國宣言>(등록번호 : 440716) 역시 원본이 아니라 일어로 번역된 요약본만이 보관되어 있다. 이외에 민청학련 관련자들의 구속 이후 각종 재판자료와 호소문, 탄원서, 기도문, 사진, 신문스크랩 등을 찾아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