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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최종길교수의문사사건

최종길 서울대 법대 교수가 ‘유럽 거점 간첩단 사건’ 수사에 대한 중앙정보부의 협조 요청으로 1973년 10월 16일 중앙정보부 남산분청사(현 서울시청 개발연구원)에 자진 출두하여 조사를 받다가 19일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다. 이에 대해 중앙정보부는 최종길 교수가 간첩 혐의로 16일에 구속되어 자백한 뒤 7층 심...

최종길 서울대 법대 교수가 ‘유럽 거점 간첩단 사건’ 수사에 대한 중앙정보부의 협조 요청으로 1973년 10월 16일 중앙정보부 남산분청사(현 서울시청 개발연구원)에 자진 출두하여 조사를 받다가 19일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다. 이에 대해 중앙정보부는 최종길 교수가 간첩 혐의로 16일에 구속되어 자백한 뒤 7층 심문실에서 창밖으로 투신자살했다고 발표하였다. 그리고 10월 25일에는 ‘유럽 거점 대규모 간첩단 사건’을 발표하였는데, 최종길 서울대 법대 교수도 유럽 거점 대규모 간첩단의 총책 이재원에게 간첩으로 포섭되어 입북하여 미화 1,000불을 수령하고, 1962년부터 1967년까지 매년 2회씩 활동상황을 보고했으며, 1970년 미국 체류 중 북한 공작원과 접촉했다고 발표했다.

최종길 교수의 죽음은 8월 8일 김대중 납치 사건과 함께 유신 독재의 시작을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사건이 발생하자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1974년 12월 18일 명동성당 추모미사에서 사인에 대해 공개적인 의문을 제기하였고, 1988년에는 “최종길 교수의 죽음은 그를 간첩으로 만들기 위한 혹심한 고문수사 과정에서 빚어진 폭압적 전력에 의한 살인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며 서울지방검찰청에 재수사를 촉구하면서 당시의 중앙정보부장, 담당수사관들 관계자 22명을 검찰에 고발했다. 그러나 검찰은 공소시효 만기를 기화로 “타살했다는 증거도 자살했다는 증거도 찾지 못했다”면서 수사를 종결하였다. 그러나 최 교수의 죽음은 국내 ‘의문사 1호’로 기록됐고 2002년 5월 24일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한상범)는 “최 교수가 간첩이라고 자백한 사실이 없고 당시 심한 고문 및 모욕 등을 당하면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 스스로 죽음에 이르게 된 것”이라며 위법한 공권력의 행사로 사망한 것을 인정하고 의문사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6조의 규정에서 정하는 구제조치를 취하기로 했다.

한편 최종길 교수에 대한 고문 및 그로 인한 사망에 가담한 차철권, 김상원은 형법 제125조(폭행,가혹행위), 형법 제259조(상해치사)의 경합범, 변영철은 고문에만 가담하여 형법 제125조 (폭행,가혹행위), 사건 발생후 허위서류 작성에 가담한 조일제, 안경상, 장송록, 서철신, 정낙중, 권영진, 차철권 , 김상원 등은 허위공문서작성죄, 동행사죄(형법 제227조, 229조)가 성립하지만 모두가 범죄일로부터 형사소송법 제249조에서 정하는 공소시효가 경과되었음이 명백하므로 범죄에 가담한 자에 대하여 고발 및 수사의뢰를 하지는 않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2004년 7월 최종길 교수의 유가족이 국가를 상대로 낸 67억원 손해배상 청구소송에 대해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23부는 7일 결정문에서 “피고인 대한민국은 최 교수의 죽음에 국가적 책임을 인정하고 사건을 화해로 종결하는 것이 타당하다”며 양측에 위자료 10억원의 화해권고 결정을 내렸다. 재판부는 “사회적 의미와 국가의 역사적·도덕적 책무, 원고들의 고통 등을 고려해 이같이 결정했다”고 밝혔다. 법원은 그러나 최 교수의 타살 가능성이 크다고 하면서도 정확한 사인은 판단하지 않았다.

한편 최종길 교수가 연루된 것으로 알려졌던 ‘유럽거점 대규모 간첩단 사건’은 이른바 ‘간첩 없는 간첩사건’으로 당시 중앙정보부에 의해 조작된 것으로 드러났다고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밝혔다. 의문사진상규명위는 “유럽거점 간첩단 사건을 재조사한 결과 단 한명의 간첩도 없는 조작극임이 드러났다”며 “당시 조직총책으로 지목된 네덜란드 유학생 이재원씨가 북한공작원이라는 증거가 없어 유럽거점 자체가 존재하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고 설명했다. ‘유럽거점 대규모 간첩단 사건’은 유럽 유학이나 출장을 다녀온 학자와 공무원 등 54명이 유럽에서 북한공작원과 연계, 간첩활동을 벌였다고 중정이 발표한 사건으로 당시 이 사건과 관련, 3명이 구속(이중 최 교수는 사망)되고 17명이 불구속입건, 31명에 대해 경고가 내려졌다. 진상규명위는 “당시 이 사건에 연루된 인사 대부분이 1967년 간첩단 사건인 동백림 사건의 미체포자인 이씨와 관계된 이들로 중정은 이들을 모두 간첩조직으로 조작했으며 최 교수도 이씨와 중·고교 동창생이라는 이유로 이 사건에 연루시킨 것으로 드러났다”고 덧붙였다.

주요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한국민주화운동사 연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 서중석 저,『한국현대사 60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 시대의 불꽃 2 『최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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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소개

최종길 교수 고문치사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추진위원회가 생산한 각종 문건(등록번호 : 477830외)과 학술단체협의회 주최 <학술 심포지엄 의문사 문제의 해결을 위한 법적 모색>(등록번호 : 2779) 등 22건의 문건, 성명서, 신문스크랩, 사진 등이 소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