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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김대중납치사건

박정희가 종신집권으로 가는 마지막 관문이었던 1971년 4월 27일 실시된 대통령선거에서 95만 표 차이로 패배한 신민당 후보 김대중은 박정희의 최대 정적이었다. 대통령 선거 패배 후 국외에 체류 중이던 김대중은 이른바 10월유신이 선포되자 귀국을 포기하고 일본에 체류하면서 유신 통치에 반대하며 박정권에 저항하였다...

박정희가 종신집권으로 가는 마지막 관문이었던 1971년 4월 27일 실시된 대통령선거에서 95만 표 차이로 패배한 신민당 후보 김대중은 박정희의 최대 정적이었다. 대통령 선거 패배 후 국외에 체류 중이던 김대중은 이른바 10월유신이 선포되자 귀국을 포기하고 일본에 체류하면서 유신 통치에 반대하며 박정권에 저항하였다. 김대중은 1973년 미국에서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를 결성한 데 이어, 일본에서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 결성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에 부담을 느낀 유신정권은 중앙정보부 요원들로 하여금 1973년 8월 8일 일본 도쿄 팔레스 호텔에서 김대중을 납치하여 바다에 수장하려 하였으나 결국은 그렇게 하지 못하고 129시간 만에 서울로 압송하였다. 8월13일 김대중은 자칭 구국동맹 행동대원에 의해 납치돼 서울 동교동 자택으로 귀환한 후 기자회견을 갖고 피랍 5일간을 설명했다. 일본 요미우리신문은 8월 23일 김대중 납치 사건에 대해 보도하면서 “한국 정보기관이 김대중 납치 사건에 관련됐다는 사실을 한국 정보 소식통이 처음으로 인정했다”고 전했다. 이에 관련 사실을 전면 부인해온 박정권은 8월 24일 한국 정보기관의 김대중 납치 사건 관련 보도 기사 취소 요구에 불응했다는 이유로 요미우리신문 서울지국을 폐쇄했다. 박정권은 국내 야당 지지자들의 강한 반발과 주권 침해라는 일본의 비난에 직면해 대일관계가 심각한 교착상태에 빠져들자 미국의 주선으로 일본 정부와 막후접촉을 벌여 주일 한국대사관 1등 서기관 김동운의 해임, 김대중의 해외체류 중 언행에 대한 면책, 김종필 총리의 사과방일 등에 합의했다. 10월 26일 김대중은 연금이 풀리면서 자택서 기자회견을 갖고 “현재와 같은 여건 아래서는 정치활동을 하지 않겠으며, 한일 간의 우호에 금이 가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11월 1일 김용식 외무부장관은 ① 김동운 서기관은 그 직을 면하고 수사 계속 ② 김대중의 체일 중 언동에 대해 반국가적 언동을 재범치 않는다면 책임 묻지 않겠다 ③ 김 총리가 방일하여 유감을 표시했다 등을 내용으로 하는 김대중 납치 사건에 관한 한일 간의 종결 조치를 발표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유신체제에 대한 국제적 비난은 고조되었으며, 해외동포들의 유신반대 운동이 활발히 시작되었다. 국내에서도 1973년 10월 2일 서울대 문리대생들이 “정보정치 철폐”와 “김대중 납치 사건의 진상 규명”을 주장하면서 시위를 벌인 것을 시발점으로 학생 시위가 2년간의 침묵 상태를 깨고 분출되었다. 1973년 말에는 각계의 운동이 연합하여 개헌청원100만인서명운동으로 발전되었다. 2007년 10월 24일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진실위)는 지난1973년 8월 발생했던 김대중 납치 사건은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지시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며 최소한 묵시적 승인은 있었다는 판단을 내렸다.

주요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한국민주화운동사 연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 서중석 저,『한국현대사 60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홈페이지 연대별민주화운동사 http://www.djroad.com/life_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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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소개

약 20건의 사료가 소장되어 있다. 신문스크랩 <김대중납치 규탄대회 17일 워싱턴에서 열려>(등록번호 : 518684)는 사건 발생 당시 미국 교포들의 행동을 볼 수 있는 사료다. <김대중 납치사건 관련 일지 및 자료>(등록번호 : 165626)는 1975년에 이 사건을 정리한 것으로, 당시의 문제의식을 알 수 있다. 그 외 포드 미대통령에게 보내는 탄원서(등록번호 : 516827), 진정서(등록번호 : 429720)등 사건의 의혹을 밝히는 사료들이 있다.